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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경적 묵상법인가? - 요가에 대해서
복 있는 사람
2004. 11. 22. 15:20
올해 초에 낮은울타리에 실렸던 안점식('氣, 무엇이 문제인가?, 죠이선교회 출판부)님의 '왜 성경적 묵상법인가?' 라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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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경적 묵상법인가? / 안점식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단전호흡, 뇌호흡, 기공, 요가, 마음수련, 초월명상, 마인드콘트롤 등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비기독교인인 물론이고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러한 동양적 수행법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종교다원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동양적 수행법들의 존재는 피할 수 없는 질문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이러한 수행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적으로 합당한가? 합당하지 못하다면 왜 합당하지 못한가?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인가? 왜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논거없이 반대하고 있는가? 단순히 건강 차원에서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여러 동양적 수행법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모든 동양적 수행법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목표는 한마디로 압축해서 말한다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통은 정체성의 문제로 나타날 수도 있고, 인간 관계의 문제로 나타날 수도 있고, 건강의 어려움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환경의 어려움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동양의 수행법들은 고통이 없는 상태, 즉 평안, 자유를 추구한다. 그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수행함으로써 정체성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며 따라서 자신감을 갖게 되고 두려움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극복할 수 있고 건강도 좋아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러한 고통은 탐욕과 집착에서 오기 때문에 자신들의 수련 방법을 행하면 마음에 절대적 자유를 얻게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체성의 확립, 자기실현, 평안, 기쁨, 대인관계에서의 조화, 스트레스의 극복, 마음의 절대자유, 신체적 건강, 이러한 것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아마도 성경적 영적 훈련의 결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방법의 문제이지 목표의 문제는 아니다.
동양의 수행법들은 크게 나누면 세가지 종류로 요약되어지는데, 첫 번째는 마음(心)을 조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호흡(息)을 조종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신체(身)를 조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법들은 나에게서 출발하며 나의 혼(魂)적, 육(肉)적 차원을 조종하고 통제함으로써 되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적 방법은 관계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정체성의 상실, 불안, 슬픔, 대인관계의 갈등, 마음의 얽매임, 신체적 질병 등의 고통이 원죄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며 따라서 평안도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죄의 결과이고 모든 인간 고통의 출발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을 극복하고 궁극적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관계의 회복에서 출발해야 함을 말한다.
성경적 평안, 즉 샬롬(shalom)은 마음이나 호흡, 신체 등의 조작으로 인해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실현되어지는 것이다. 관계의 회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영(靈)이란 하나님과 관계하는 자리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을 때 영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따라서 우리는 영이 죽었다고 말한다. 동양의 수행법들이 영의 차원에서 출발할 수 없는 진정한 이유는 영이 죽어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 수행법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있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립하며 나와 나자신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나자신과 화해한 사람이야말로 진정 타인과 화해할 수 있다. 나자신과 화해되지 않는 사람은 대인관계의 갈등이 발생했을 때 관계회복을 시도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차단하거나 완화하기 위해서 마음이나 호흡이나 신체를 조작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적 평안은 관념이나 의식의 조작 차원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의 차원이다. 회개는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며 성화는 관계의 회복 과정이기도 하다. 동양적 수행법의 문제는 관계의 회복없는 평안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동양의 수행법은 고통을 제거하고 평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의식의 집중 행위를 통해서 변성의식 상태로 들어간다. 마음, 호흡, 신체 어느 차원에서 출발하든지 궁극적으로는 황홀경, 무아경, 삼매경, 몰아경과 같은 변성의식을 추구한다. 이 변성의식은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이라고도 불리는 상태인데, 알파(α)파 등의 뇌파 상태로 표시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태는 곧 초자연적 영의 공격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상태이다.
동양의 수행법은 스스로 의식을 통제하고 조작함으로써 평안을 추구한다면, 기독교의 방법에는 단순히 내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서 얻은 평안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지켜주시는 평안이 있다 (요14:27, 빌4:7). 왜냐하면 성경적 평안은 관계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주장해주시고 다스려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묵상법은 철저히 의식에서 출발한다. 의식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마음 판에 새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그 개념과 범주,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러나 성경적 묵상법의 핵심은 순종에 있다. 지속적 순종에 의해서 하나님 말씀, 성경적 세계관은 우리 안에서 체질화되어지고 우리의 무의식을 차원을 치유하고 새롭게 한다. 지속적 순종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나자신과의 관계의 회복, 타인과의 관계의 회복을 실현하고 그 평안과 기쁨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묵상법은 개인적 평안의 차원을 넘어서 나를 포함한 공동체적 평안을 가져오며, 의식적 조작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적 차원에서 완성되어진다.
성경적 평안은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의 평안을 위해서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고 희생이다. 그래서 평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님은 기꺼이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 이 땅에서 죄의 영향력이 지구적 차원에서 전적으로 소멸되기 전까지는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고난은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요청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은혜를 입은 자가 될 것인지 잘 생각해보자.
안점식 (한국선교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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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경적 묵상법인가? / 안점식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단전호흡, 뇌호흡, 기공, 요가, 마음수련, 초월명상, 마인드콘트롤 등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비기독교인인 물론이고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이러한 동양적 수행법들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종교다원사회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동양적 수행법들의 존재는 피할 수 없는 질문과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이러한 수행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경적으로 합당한가? 합당하지 못하다면 왜 합당하지 못한가?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인가? 왜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논거없이 반대하고 있는가? 단순히 건강 차원에서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여러 동양적 수행법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모든 동양적 수행법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목표는 한마디로 압축해서 말한다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통은 정체성의 문제로 나타날 수도 있고, 인간 관계의 문제로 나타날 수도 있고, 건강의 어려움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환경의 어려움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동양의 수행법들은 고통이 없는 상태, 즉 평안, 자유를 추구한다. 그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수행함으로써 정체성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며 따라서 자신감을 갖게 되고 두려움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잘 극복할 수 있고 건강도 좋아질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러한 고통은 탐욕과 집착에서 오기 때문에 자신들의 수련 방법을 행하면 마음에 절대적 자유를 얻게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체성의 확립, 자기실현, 평안, 기쁨, 대인관계에서의 조화, 스트레스의 극복, 마음의 절대자유, 신체적 건강, 이러한 것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아마도 성경적 영적 훈련의 결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방법의 문제이지 목표의 문제는 아니다.
동양의 수행법들은 크게 나누면 세가지 종류로 요약되어지는데, 첫 번째는 마음(心)을 조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호흡(息)을 조종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신체(身)를 조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법들은 나에게서 출발하며 나의 혼(魂)적, 육(肉)적 차원을 조종하고 통제함으로써 되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적 방법은 관계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정체성의 상실, 불안, 슬픔, 대인관계의 갈등, 마음의 얽매임, 신체적 질병 등의 고통이 원죄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며 따라서 평안도 기본적으로 관계적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은 죄의 결과이고 모든 인간 고통의 출발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통을 극복하고 궁극적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관계의 회복에서 출발해야 함을 말한다.
성경적 평안, 즉 샬롬(shalom)은 마음이나 호흡, 신체 등의 조작으로 인해서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 의해서 궁극적으로 실현되어지는 것이다. 관계의 회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기독교적 의미에서 영(靈)이란 하나님과 관계하는 자리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을 때 영은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고 따라서 우리는 영이 죽었다고 말한다. 동양의 수행법들이 영의 차원에서 출발할 수 없는 진정한 이유는 영이 죽어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 수행법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에 있다. 그것은 나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립하며 나와 나자신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나자신과 화해한 사람이야말로 진정 타인과 화해할 수 있다. 나자신과 화해되지 않는 사람은 대인관계의 갈등이 발생했을 때 관계회복을 시도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차단하거나 완화하기 위해서 마음이나 호흡이나 신체를 조작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성경적 평안은 관념이나 의식의 조작 차원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의 차원이다. 회개는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며 성화는 관계의 회복 과정이기도 하다. 동양적 수행법의 문제는 관계의 회복없는 평안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동양의 수행법은 고통을 제거하고 평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의식의 집중 행위를 통해서 변성의식 상태로 들어간다. 마음, 호흡, 신체 어느 차원에서 출발하든지 궁극적으로는 황홀경, 무아경, 삼매경, 몰아경과 같은 변성의식을 추구한다. 이 변성의식은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이라고도 불리는 상태인데, 알파(α)파 등의 뇌파 상태로 표시되기도 한다. 이러한 상태는 곧 초자연적 영의 공격을 쉽게 받을 수 있는 상태이다.
동양의 수행법은 스스로 의식을 통제하고 조작함으로써 평안을 추구한다면, 기독교의 방법에는 단순히 내가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서 얻은 평안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주장하시고 지켜주시는 평안이 있다 (요14:27, 빌4:7). 왜냐하면 성경적 평안은 관계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주장해주시고 다스려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묵상법은 철저히 의식에서 출발한다. 의식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마음 판에 새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그 개념과 범주,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러나 성경적 묵상법의 핵심은 순종에 있다. 지속적 순종에 의해서 하나님 말씀, 성경적 세계관은 우리 안에서 체질화되어지고 우리의 무의식을 차원을 치유하고 새롭게 한다. 지속적 순종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 나자신과의 관계의 회복, 타인과의 관계의 회복을 실현하고 그 평안과 기쁨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묵상법은 개인적 평안의 차원을 넘어서 나를 포함한 공동체적 평안을 가져오며, 의식적 조작의 차원을 넘어서 실천적 차원에서 완성되어진다.
성경적 평안은 관계적이고 공동체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체의 평안을 위해서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고 희생이다. 그래서 평강의 왕이신 우리 주 예수님은 기꺼이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해서 이 땅에서 죄의 영향력이 지구적 차원에서 전적으로 소멸되기 전까지는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고난은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요청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은혜를 입은 자가 될 것인지 잘 생각해보자.
안점식 (한국선교훈련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