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크고 작은 기쁨들이 있는데, 그 기쁨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름의 기쁨이고, 또 하나는 같음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남들과는 다르기를 원합니다. 더욱 멋지게 보이길 원하고, 같은 옷을 입는 것을 거부합니다.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 위해 애를 쓰고, 남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합니다. 그리하여, 근사한 지위를 가지거나 부를 쌓음으로써 ‘남들과는 다름’에서 오는 기쁨을 누립니다. 저는 이러한 기쁨을 ‘다름의 기쁨’이라 부릅니다. 이 기쁨은 남들과 같아서는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없는 21세기와 같은 사회에서는 ‘자기 계발’ 내지는 ‘성공’이라는 덕목으로 간주되어 아주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1등이 되는 것이 다름의 기쁨을 가장 극대화하는 것이리라!” 는 어떤 이의 말은 야심 찬 젊은이들을 흥분시킵니다.
다름의 기쁨은 누구나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고, 이는 당연한 것입니다. 캘리포니아 와인 제조업체의 사장인 로버트 몬다비의 말처럼 말입니다. “어려서 구슬치기를 할 때부터, 저는 이미 최고가 되고 싶었습니다.”
미국 슈퍼볼 챔피언인 덴버 브롱코스의 감독 ‘마이크 샤나한’이 자신의 팀 선수들에게 원했던 ‘차별화에 강한 선수’가 되는 것은 매력적이고, 우리에게 의욕적인 동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저는 이 다름의 기쁨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다름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 달려가고 있으니까요. 너무 빨리 달려 골인 지점에서 그가 숨 헐떡임으로 괴로워하진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니까요. 톨스토이의 소설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나오는 욕심쟁이 주인공처럼 우리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이 다름의 기쁨은 인류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기쁨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살았던 20세기와 앞으로 살아갈 21세기에서는 자연스럽게 다름의 기쁨만을 향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문화가 지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 시대를 떠도는 관념의 위력은 대단하기 때문에 그 관념이 그릇된 것이라면 파괴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다름의 기쁨은 그 자체만으로는 그릇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것을 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다름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다름의 기쁨은 생존력과 경쟁력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름의 기쁨 그 자체만으로는 그릇된 것이 아니지만, 다름의 기쁨만을 추구하는 삶이라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 아니라고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전우익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삶에는 다름의 기쁨 못지 않은 또 하나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젠 또 다른 하나의 충만한 기쁨인 ‘같음의 기쁨’을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너와 내가 하나의 지구인이고, 피부색과 종교가 다르더라도 같은 하늘 아래 사는 하나의 가족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회 사제이자 심리학자인 헨리 나우웬은 이 기쁨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발견하기는 쉬운 기쁨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경험한 얘기를 들려 줍니다. 이것이 바로 같음의 기쁨입니다.
1964년의 일입니다. 나는 앨라배마 지역에서 마틴 루터 킹 2세가 이끄는 민권운동 시위대에 끼어서, 수천 명과 함께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행진했습니다. 행진하면서 경험한 그 기쁨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단신으로 거기에 참여했습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어깨에 팔을 얹고 함께 걸어가면서 목청껏 ‘우리 승리하리라’를 불렀을 때, 나는 여태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그래, 그렇고 말고. 나도 같은 일원인걸. 이들은 내 사람들이야. 다른 피부색, 다른 종교,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이 사람들은 내 형제들이고 내 자매들이야. 난 이 사람들과 하나야.’
우리의 차이가 마치 태양 볕 아래의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저울질하던 모든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극적인 경험을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러한 기쁨은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번에는 법정 스님의 예를 들지만 말입니다.
“거름을 묻으려고 흙을 파다가 문득 살아남은 자임을 의식한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는 더욱 아끼고 보살펴야 할 것이다.”
또한, 법정 스님은 『영혼의 모음』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돌아보니 울컥 목이 메었다. 하루의 고된 생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눈매에서 뭐라 말하기 어려운 인간의 우수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이웃으로서의 정다움을, 굳게 맺어진 인연의 밧줄 같은 것을 문득 실감했었다. 납덩이처럼 무겁고 답답하기만 한 이 가을의 공기 속에서 그토록 선량한 눈매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같음의 기쁨 또한 발견해야만 합니다.
저는 특별히 이 기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모두들 남들과 달라지기 위해서만 노력을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자기 계발이라는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가느라, 주위를 돌아보는 데에는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몇몇 저자들은 부단히 자기 계발을 하라고 부추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페달을 밟는데 게으르면, 마치 자전거가 쓰러지기라도 하는 듯 유난을 떱니다. 그래요, 정 남들과 달라야 한다면 자기 계발이라는 자전거 타기의 프로페셔널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자전거를 아주 천천히 타는 법을 터득하십시오. 걷는 것만큼이나 천천히 타는 법도 배우고, 좁은 공간에서 한 바퀴를 도는 법도 터득하고, 옆을 보며 달려가는 것도 익혀 우리 옆의 산천이 어떻게 변하는지 한 번 보십시오. 한 손을 놓고 타는 법도 터득하여 옆의 사람과 악수도 해 보시길 부탁 드립니다. 사실, 이 부탁은 가장 먼저 제 자신에게 해야 할 말입니다.
같음의 기쁨은 여유로운 삶에서 옵니다.
저녁 시간 가족과의 훈훈한 대화에서, 한번 꼭 보자고 한 친구와의 기분 좋은 만남에서, 일감 바구니를 비워보려고 발버둥치는 삶에 쉼표 하나를 찍는 여유에서 오는 것입니다. 리처드 칼슨의 말대로 다음 주가 되면 일감 바구니가 비워지겠지, 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같음의 기쁨은 따뜻한 마음에서 옵니다.
남 모르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손길에서, 한번쯤은 지식인처럼 내 자신의 고민뿐 아니라 인류의 고민도 함께 고뇌함에서 옵니다. 추운 겨울, 길거리 한 모퉁이에서 야채를 파는 할머니 눈가의 주름에 마음이 움직여 야채 한 묶음을 사 들고 오는 마음에서 같음의 기쁨이 옵니다.
그리고, 같음의 기쁨은 지혜에서 옵니다. 같음의 기쁨은 지식이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머리보다는 가슴에서 옵니다. 현대 문명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인간의 불멸성을 주입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산다는 착각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필멸성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더욱 쉽게 같음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또한 같음의 기쁨은 자연에서 옵니다. 자연 속을 걸으며, 숲의 내음을 맡을 때 느끼는 기쁨입니다. 생명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자연을 아끼며 사랑하는 삶에서 옵니다.
같음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나무가 나무에게 우리 더불어 숲이 되자고 하듯, 우리는 옆의 사람들에게 우리 더불어 아름다운 사회가 되자고 말합시다.
이 글이 당신의 양 손에 두 가지 기쁨을 동시에 쥐어주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한 쪽 손에는 다름의 기쁨을, 다른 손에는 같음의 기쁨을 말입니다. 혹시 당신의 양 손에 다름의 기쁨만이 쥐어져 있다면 지금 한 손을 펼쳐버리세요. 우리는 두 주먹 꼬옥 쥐고 이 땅에 태어납니다. 탄생은 그런 결연한 의지로 시작되는 신비스러운 시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자연의 땅으로 돌아갈 때, 또는 하나님 나라로 돌아갈 때는 두 손을 쫘악 펼친 채 이 땅을 떠나갑니다. 죽음은 그런 편안한 행복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끝입니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우리는 한 주먹만 꼬옥 쥐면 됩니다. 주먹을 쥔 손에는 다름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손을 펼치시길 바랍니다. 역설적이게도 같음의 기쁨을 잡기 위해서는 주먹을 펼쳐야 합니다. 제가 두 가지 기쁨을 여러분의 양 손에 쥐어드린다고 말했지만, 여러분을 두 가지 기쁨을 쥐기 위해 한 손은 펼치고, 한 손은 주먹을 꼬옥 쥐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름의 기쁨에 대한 내용을 읽으실 때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읽으십시오. 당신의 가슴 속에 원대한 비전을 갖게 되길 소망합니다. 헬렌 켈러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지는 순간, 누가 느릿느릿 걸어가고만 싶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충동을 일으켜 드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같음의 기쁨에 대한 내용을 읽으실 때는 편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읽으십시오. 당신의 가슴 속에 다른 사람과 사랑으로 더불어 사는 행복이 가득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내일이면 우리로 인해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부디 균형 있는 기쁨을 통해 건강하고도 행복한 삶을 영위하시길 기도 드립니다.